[기사] 백설탕 없이 짜장면 만들기, 가능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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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두레지기 작성일15-11-10 09:42 조회15,771회 댓글0건본문
백설탕 없이 짜장면 만들기, 가능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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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을 대신할 것을 찾았다
그래, 남들은 생각지도 못하는 MSG마저 과감히 뺏는데, 한 가지도 아니고 20가지 이상이나 화학물질이 들어간다는데, 까짓것 설탕도 바꿔보자고 작정했다. 그런데 그 흔한 정제설탕 말고 다른 설탕이 있기나 한가? 아무 정보도 없던 우리에게 대안을 마련해준 것이 시사잡지였는지, 인터넷이었는지, 책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쨌거나 우리는 정제하지 않은 원당이 두레생협을 통해서 판매되고 있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그것은 마스코바도였다. 그런데 이 땅 끝 섬 마라도에서 서울·경기지역에만 있는 두레생협의 설탕을 어찌 살 수 있담?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 찾으면 나오고, 두드리면 열린다는 것을 그때부터 터득해 온 '지독한' 부부가 아닌가? 내가 평택에 사는 동안 이웃사촌이었던 선배네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이야기했다. 언니, 언니하며 선배보다 더 가깝게 지냈던 선배의 아내는 훨씬 이전부터 자연주의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어서 길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방법을 찾았다. 언니의 지인이 두레생협의 이사였고, 우리의 사정을 전해 듣고는 마스코바도를 마라도까지 택배로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그리하여 그 귀한 설탕이 한 달에 한 번씩 박스째 마라도로 날아왔던 것인데, 이렇게 하여 지금도 애지중지 여기는 마스코바도와의 인연은 우리 짜장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두레생협은 필리핀 네그로스 섬의 원주민들이 200여 년 동안 이어온 전통방식으로 만든 마스코바도를 공정무역이라는 형태로 들여와 조합원들에게만 판매를 한다. 유기 재배한 사탕수수를 쪄서 짜내어 말린 원당이다. 화학물질이 전혀 들어가지 않아서 천연이고, 사탕수수의 미네랄이 그대로 녹아 있어 영양과 맛이 풍부하다. 설탕 하나로 요리가 맛있어진다. 달아서 맛있다고 뇌가 착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를 통해 마스코바도를 알게 된 사람도 부지기수다. 한 번 써보면 그 매력에 푹 빠져든다.
몇 년이 지나 마스코바도의 인기가 오르자,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판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설마, 하고 찾아보니 죄다 남미에서 온 것들이다. 언젠가 기회가 닿아 사용해 본 적도 있는데, 입자도 다르고 맛은 더더구나 다르다.
'마스코바도'라는 말의 어원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당당하게 같은 이름을 내걸고 판매를 하고 있는 걸 보면 지적재산권 문제는 아닌 듯하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마스코바도를 만나면서 MSG를 넘어서 본질적이고 복잡다단한 식품첨가물의 세계에 한 발짝 더 발을 들여놓게 되었던 것이다. 설탕이 아니었다면 그저 MSG 하나만 배제한 것으로 할 일을 다 한 듯 짜장면을 팔아왔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가게에다 커다랗게 '무(無)정제설탕'이라는 글자도 덧붙였다. 그러나 웰빙 바람이 몇 차례 지나간 지금도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식의 반응이 대부분인데, 그때는 오죽했겠는가? 그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제설탕이 무슨 말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판국에 그 앞에다 '무(無)'를 쓰건 '유(有)'를 쓰건 알 바가 아닌 것이다. '정제'는 '순수'와 동의어로 느끼게끔 기업이 의도적으로 설정한 어용단어이다. 정제당하는 해당 생물의 각종 미네랄을 '불순물'이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 목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는 '3무(無)'를 자랑스러워했고, 기회 있을 때마다 웅변을 토해냈다. 그것이 호감보다는 반감을 살 때가 더 많다는 것도 경험상 알게 되었지만, 우리는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진짜 '순수'가 무엇인지 반드시 알게 하겠다는 오기가 뻗쳤다. 여러 해가 지난 뒤, 제주에 내려와 '시인의 집'이라는 카페를 연 시인 손세실리아 언니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이리 어려운 길을 택한 건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이미 두 번이나 망한 뒤여서 정말 절절한 심정이었다. 그러자 언니는 "네가 시인이라서 그래"라고 했다.
순간, 가슴이 뭉클하면서 아주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맞아, 내가 시인이었지'라는 생각과 '어, 이거 멋진데!'라는 생각과 '진짜 그래서 그랬을라나?'라는 생각이 뒤섞이면서 시인이라서 그랬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숙명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나 자신을 다독였던 것도 같다. 그래서 또 망할지언정 포기란 없다며, 그때야 비로소 '자연주의'란 단어를 당당하게 내걸고 세 번째 가게를 열었다가 보기 좋게 또 망했다.
삼세판 완패면 접을 만도 한데, 갈 데까지 가 보자는 심정으로 네 번째 가게를 열었고, 그것이 지금의 화순 가게이다. 아니, 사실은 갈 데까지 가 볼 자신은 더 이상 없었고,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절박함으로, 여기서도 안 되면 모든 걸 접는다는 각오였다. 아니, 그것은 각오라기보다 자포자기에 더 가까웠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달리 해볼 것도 없었다. 다른 무엇을 새로 시작하는 어려움보다 하던 거 하는 게 일단은 편하니까, 딱 한 번만 더 해보자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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